이전 화: 물생 3화
물생 4화
그날 자취방에는 <주인탐구생활>이란 주제로 회의가 열렸다. 의견을 낸 내가 회의의 진행자가 되었고, 집에 있는 물건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다. 우선 나는 주인의 성격과 습관에 대해 토론해 보자고 운을 뗐다. 주인의 성격과 습관에 대해 잘 알아야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상할 수 있고, 그에 맞춰 각자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부가적으로 설명했다.
"주인님은 자신이 잘생긴 줄 압니다. 자존감이 높아도 너무 높아요. 제 앞에서 얼굴을 이리 저리 돌리며 지긋이 바라보시곤 만족해하시는 표정을 지으시는데 참 난감할 따름입니다."
거울이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가장 먼저 발언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셀카 고문을 수없이 받았던 나는 그 심정을 이해했기에 고개를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뭐 주인이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고, 평생 우울하게 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여러분도 자존감을 가지세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으니까요."
자기계발과 관련된 한 책이 설교조로 말했다. 그러자 거울은 공감해주지 않은 것에 흥이 깨졌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주인 자식은 청결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부모님이 이따금 오실 때 아니면 저는 거의 빈둥빈둥 놉니다. 이러다 일도 맘껏 못하고 늙어 버려질까 두렵습니다."
가전제품계의 철밥통인 청소기가 두 번째로 발언했다.
"맞습니다. 주인님은 너무 더럽습니다. 밖에서 진드기와 미세먼지 다 묻히고 와선 그대로 제 위에 누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침대가 자신의 몸에 묻은 얼룩들을 제시하며 청소기의 말에 동조했다.
"자주 코를 파시는데, 코 판 손을 씻지도 않고 저를 터치하십니다. 그때마다 전 화가 나서 진동하죠!"
회의를 진행하는 나도 덧붙였다. 동일한 고문을 많이 당한 노트북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주인은 피부관리나 외모 단장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항상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지기 일쑤입니다. 참 통탄할 일입니다. 이런데도 여자친구가 있는 것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로션과 스킨, 향수, 썬크림을 대표해서 향수가 소리를 높여 이야기했다.
"여자친구 분께 선물 받은 저를 처음에는 몇 번 쓰더니 이젠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결국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간 것을 확인하더니 화장실 변기 위에 저를 놓고 방향제로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버려지지 않고 어딘가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하는 건지, 참나 원."
“큭”
슬픈 이야기였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물건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잠시 후 다들 미안했던지 애처로운 눈빛으로 변기 위에 놓여 있는 향수를 바라보았다.
"전 어디 쓰일 때 없을까요?"
유통기한이 2년이나 지난 스킨이 물었다.
"음, 빨래 돌리실 때 넣어달라고 하는 건 어때? 섬유유연제처럼 말이야!"
세탁기가 좋은 생각이란 듯이 스킨에게 조언했다.
"너무 어지러울 것 같긴 한데, 산 채로 버려지는 것보단 나을 것 같네요. 거기서라도 장렬히 죽음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느낀 스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제대로 안 쓸 거면 사질 말든지! 비참하게 이게 뭐람!"
듣고 있던 변기통은 분통을 터트렸다. 한참 정적이 흘렀다. 너무 주인의 단점만 토로 되는 것 같아 나는 질문을 바꿨다.
"이런 사람을 우리의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는 게 다소 슬퍼지는 것 같으니, 이제 긍정적인 점을 이야기해 볼까요?"
"제 생각에 주인님은 뭔가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 공책, 메모지에 무언가를 자주 기록하시죠."
하루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주인과 함께 하는 책상이 말했다.
"그렇다면 볼펜도 이 사실을 잘 아시겠군요. 볼펜,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회를 맡은 나는 중립을 유지하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덕분에 아마도 가장 이 집에서 가장 수명이 짧은 게 바로 저일 거예요. 길어야 3개월 동안 사니까요. 그래도 버리지 않고 제 검은 피 한 방울까지도 남기지 않고 사용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물생의 목적에 맞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죠. 제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게 해주시는 분이 주인님이십니다."
볼펜이 비장하게 답변했다.
"저도 주인님을 옹호합니다. 저를 한 장 한 장 읽어주시고, 저에 대한 감상도 써주시기 때문이죠. 어떤 친구들은 주인 잘못 만나서 냄비 받침으로 쓰인다는데, 뜨거운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저로선 참 다행인 일이죠."
한 소설책이 볼펜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니! 그런 주인이 있단 말이야! 내 친구들의 일자리를 그렇게 무참히 뺏어버리다니!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야겠어."
냄비 받침은 발끈했다.
"기록하는 걸 좋아하고, 책 읽는 것 좋아한다는데 주인님은 왜 공대에 갔을까요? 공대생이면 보통 물리나 수학, 코딩 이런 것들에 기쁨을 느끼지 않나요?"
노트북은 의아한 듯 불특정 다수에게 물었다.
"허구한 날 밖에서 외국 사람들 만나러 다니고, 틈날 때 카페 가서 책 읽고, 집에서 글이나 끄적끄적해대고, 나중에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참 걱정이야. 또 공대생이 왜 저 추운 하얼빈까지 가서 중국어를 배웠대. 학점이나 신경 쓰지. 2학년 전공을 이제 와서 재수강이나 하고. 항상 함께 다니는 나로서는 정말 쪽팔려 죽겠어."
10년 전에 주인의 어머니가 주인이 고등학교 입학할 때 사준 손목시계가 걱정 투로 이야기했다.
"주인도 우리처럼 잘하는 게 있겠죠."
윤기 나는 밥을 이 집에서 가장 잘 만드는 밥솥이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10년 동안 주인님이 너를 안 버리셨다는 건, 너를 무척 아끼신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 비결이 뭐야? 그렇게 비싸 보이지도 않는데."
2년 후면 바뀔지도 모르는 노트북이 손목시계에게 물었다.
"정 때문 아닐까? 함께 방황하던 고등학교 시절도 보내고, 대학 때문에 함께 상경도 하고, 저 멀리 대구로 군대도 같이 가고, 중국도 같이 갔다 왔으니.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고장이 안 났거든."
"부럽다. 정말. 너처럼 오랫동안 한 주인에게 유익하게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야."
"갑자기 찬물 끼얹어서 미안한데, 왜 우리가 왜 주인의 눈치를 봐야 해? 왜 주인이 써주길 그렇게 열망해야 해? 난 그냥 내 맘대로 살래. 우리를 만든 목적이란 건 애초에 없어. 어쩌다 보니 나는 우연히 다리미가 된 거고, 또 어떤 기적적인 일로 거기 넌 세탁기가 된 거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서 그댄 볼펜이 된 거야. 그러니까 그런 거에 관심 두지 마. 머리만 아파."
다리미가 열을 내며 이야기했다.
"전 당신의 말에 동의하긴 조금 힘듭니다. 당신 말은 물생에 아무 목적이 없고, 그저 우연히 이러저러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우연히 이렇게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지닌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다...? 우릴 만드신 인간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만들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다 어딘가에 쓰임새가 있으니 만든 것 아닐까요? 추억의 순간을 남기고, 또 역사의 현장을 담기 위해서 카메라를 만든 것 아닐까요? 또 아름다운 꽃을 담기 위해서 저를 흙으로 만든 것 아닐까요?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빨기 위해 세탁기를 만든 것 아닐까요? 또 구겨진 옷을 보기 좋게 펴기 위해서 당신을 설계해서 만든 것 아닐까요?"
그동안 조용했던 꽃병이 반론을 제시했다.
"나는 우연이라는 엄청나게 신비로운 과정을 통해 다림질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어쩌다가 탑재하게 된 것이야. 인간에겐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그들이 나처럼 놀라운 물건을 설계해서 만들었다고?"
"당신 말대로 당신은 놀라운 물건이에요. 당신의 옷을 쫙 펴는 그 실력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답니다. 진심이에요. 그런데 여러 원소로 이뤄진 다양한 재료들을 조합해서 당신을 만든 지혜로운 인간이 없었다면, 당신도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없어요."
"만약 내가 다리미로 살고 싶지 않다면? 저기 잘나디 잘난 스마트폰으로 살고 싶다면? 그건 내가 선택할 수가 없는 거잖아? 인간은 너무 잔인해.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나를 다리미로 만들어버렸어."
"묻기 전엔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죠. 그런데 도대체 다리미가 어때서요? 당신이 없다면 많은 옷은 한번 세탁기에 들어가는 순간 그 아름다움을 잃게 돼요. 당신 덕분에 옷들은 다시 아름다움을 얻게 되고, 그 옷을 입고 나간 주인님은 아름다운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당신의 덕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몰라요. 그들의 품격을 한껏 높여주죠. 당신은 많은 존재를 더 빛나게 만들어주는 놀랍고도 특별한 물건이에요."
아직도 다리미는 자신에게 옷을 말끔히 펴주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선 일말의 행복감도 찾을 수 없었다.
"난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다고! 스마트폰과 노트북처럼 비싸고 인기 많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조연이 아닌 주연 말이야! 인간이나 다른 물건 없이도 나 홀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여기 누가 인간이나 다른 물건 없이 홀로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 있을까요? 당신이 부러워하는 스마트폰도 사용해 주는 인간이 있기에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거고, 저도 꽃들이 꽂혀 있을 때, 누군가 저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봐줄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 것이고, 밭솥도 쌀이 있어야 밥을 만들 수 있잖아요. 또한, 그 밥을 먹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요. 다리미 씨, 세상에 홀로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어요."
꽃병의 말이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우린 누군가와 더불어 살 때 비로소 내가 되는구나.'
회의는 주인이 잠든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물건이 주인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잘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 기뻤다. 또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는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는 예전과 달리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서로 경쟁해야만, 주인의 선택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각자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쓰임새가 다를 뿐이었다. 그날 밤 나와 친구들은 모처럼 맘 편히 잘 수 있었다.
(물생 끝!)
마무리 인사
감상평을 남겨달라 하기에도 죄송스러운 수준의 단편소설입니다만, 읽고 느끼신 바를 한줄이라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ㅋㅋ
물생은 제 창작물이니 절대 마음대로 도용하지 마시고, 이곳에서만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 링크를 걸어서 소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Life >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대아빠가 아이랑 노는법] 종이컵 피라미드를 100층으로 쌓기 위해 필요한 종이컵의 갯수는? (4) | 2021.02.12 |
---|---|
티스토리 2차 도메인 사용시 발생하는 문제와 대처법 소개 (4) | 2021.02.06 |
아메바보다 못한 뇌를 가진 신인류가 등장했다 (4) | 2021.02.04 |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를 기억하자 (2) | 2021.02.02 |
[bskyvision이 쓴 단편소설] 물생(物生) 3화 (1) | 2021.01.23 |
[bskyvision이 쓴 단편소설] 물생(物生) 2화 (1) | 2021.01.23 |
[bskyvision이 쓴 단편소설] 물생(物生) 1화 (2) | 2021.01.23 |
티스토리 블로그에 파비콘(favicon)을 추가하면 좋은 이유 3가지 (2) | 2021.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