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kyvision이 쓴 단편소설] 물생(物生) 1화

물생(物生)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 본 단편소설입니다. 약 2년 반 전에 제가 박사 과정을 시작하고 약간의 슬럼프에 빠졌을 때 쓴 것인데, 이제 공개해봅니다. 부족하지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공개하자니 많이 부끄럽네요.^^ 물생은 총 4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생 1화

"너 어제도 새벽 세 시까지 못 잤어?"

 

에어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응. 이 놈의 주인님은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자꾸 날 못 자게 만드는지 모르겠어. 침대에 팔 한쪽 베고 누워서 스포츠 기사 봤다가, 동영상 봤다가, 메시지 했다가, 책도 읽었다가, 뭔가 느낀 게 있었는지 메모 앱을 열어 뭔가를 끄적대다가, 여친이랑 달달하게 통화도 했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일어나서 온갖 멋진 척 다하면서 셀카도 찍고, 정말 정신없어 죽겠어. 다재다능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긴 하지만 주인님은 해도 해도 너무해. 잠을 자야 나도 잘 거 아니야."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요즘 물건들 사이에서 바로 너의 그 다재다능함 때문에 불만의 소리가 작지 않아. 특히, 카메라, 노트북, 공책, 볼펜을 비롯한 많은 애들이 자기들 일자리 네가 다 뺏어간다고 난리야. 너보고 물건들의 생태계를 다 파괴시키는 '황소개구리'래."

 

"뭐 내가 잘나게 태어난 걸 어떡하겠어. 그래도 나 나름대로 고민이 많아. 나는 걔네들이 하는 일을 어느 정돈 잘 해낼 수 있지만, 걔네들처럼 전문적으로 잘하지는 못해. 주인님도 중요한 상황에는 나보다는 걔네들을 애용한다고. 야! 에어컨, 그나저나 너 이 좀 닦고 다녀라. 축축한 곰팡이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야, 스마트폰, 나도 찝찝해. 주인님이 안 닦아주니까 그렇지! 와~ 진짜 쪽팔리게 다 보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단 둘이 있을 때 조용히 이야기해주는 것이 물생의 기본 예의 아니야? 나도 닦고 싶어! 보통 본인 입 냄새를 본인이 느끼긴 힘들잖아. 근데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니, 나는 얼마나 짜증나겠냐!"

 

내 핀잔을 들은 에어컨은 발끈하며 자기를 변호했다.  

 

"그나저나 우리 주인은 여름 다 지나갔는데 왜 자꾸 널 트는 거야? 추워죽겠다. 지도 추우니까 날 덮고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다니깐. 그럴 거면 끄지, 왜 자꾸 틀어놓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나라에서 이게 무슨 낭비람."

 

구겨진 채 침대에서 반쯤 흘러 내려와 있던 이불이 대화에 동참했다. 에어컨이 미안한 듯 나와 이불에게 대답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 다들. 조금만 참아. 이제 곧, 내년 5월까지 난 개점휴업에 들어갈 테니."

 

"에어컨, 너는 사계절 중에 여름에만 일하고 좋겠다. 한 철 반짝 일하고도 주인님의 사랑을 듬뿍 받잖아. 이번 여름에 주인님이 ‘나는 우리 에어컨이 제일 좋아! 너 없인 못 살아!’ 하시는 소리 많이 들었어."

 

연중무휴인 나는 에어컨에게 부러움을 내비쳤다. 

 

"나도 들었다네."

 

책상도 한마디 거들었다. 

 

"에어컨, 너는 비성수기 때는 뭐 하고 지내?"

 

나는 에어컨에게 물었다. 

 

"나야 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으니 사색을 많이 하곤 해. 고향 생각을 하거나,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친구들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 또 너희들 일 똑바로 하고 있나 안 하고 있나 감시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쩨쩨하게 주인님에게 이르진 않아."

 

"너 고향이 어딘데?"

 

"중국 천진이라고 북경 옆에 있는 도시야. 거기에 한국회사 공장들이 꽤 많이 있거든. 난 그곳에서 태어났어."

 

"너 그럼 중국말도 할 줄 알아? 니 츠 판러마(‘밥 먹었어?’라는 뜻의 중국어)?"

 

"그 공장에 일하는 사람은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국 사람들도 몇몇 있었어. 그래서 어느 정도 기초 회화는 가능해."

 

에어컨이 살짝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야, 점마 2개 국어가 가능하다니 대단하네."

 

지적 활동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책상이 존경스러움을 표현했다.

 

"책상, 너도 한 3개 국어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주인님이 전공 공부할 때 영어 원서 많이 읽잖아. 글구 중국어 공부도 가끔 하는 것 같더만." 

 

책상 위에 업혀 있던 내가 물었고, 책상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자주 영어로 된 책을 보시긴 하는데 그 뜻을 한국말로 알려주셔야 말이지. 게다가 생초짜인 내가 봐도 발음이 별로라 주인님께 배우면 나중에 쉽사리 교정하기 힘들 것 같아서 최대한 귀를 막고 있어. 중국어는 주인님께서 1년 반 동안 중국 하얼빈에 어학연수를 다녀오셔서 그런지 발음이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아. 하얼빈이 중국 전체에서도 가장 표준어를 사용하는 곳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중국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거기서 교육을 받는다나. 그렇다고 내가 중국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야." 

 

"하얼빈?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그 안중근 의사랑 관련 있는 곳 아냐?"

 

"맞아. 우리 한국제 물건들에겐 굉장히 의미 있는 곳이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점령당해 자유를 상실했었어. 그때 안중근 의사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병으로 활동하던 중에,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살하지. 안중근 의사는 그 일로 체포되어 옥살이하다 돌아가셨고.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우린 아마 지금 일본제 물건이 됐을지도 몰라."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은 책상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 내게 설명해주었다.

 

"하얼빈이 그런 역사가 있는 곳이라니 나도 가보고 싶네. 주인님이 또 하얼빈 가실 일 없으려나? 제발 그때까지 나를 버리고 새 스마트폰으로 바꾸지 마시길! 근데 책상, 너 진짜 박학다식하다."

 

"스마트한 네가 나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고마워. 나의 지적 능력을 인정해줘서. 나는 책을 참 좋아해. 주인님이 내 위에 책을 놓고 읽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도 없어. 다행히 주인님은 책을 꽤 좋아하시더라고. 그런데, 요즘 들어 주인님이 나의 행복을 깨는 순간들이 있어. 자꾸 주인님이 냄비와 밥그릇 같은 걸 내 위에 올려놓고 밥을 먹는단 말이야. 책과 펜 그리고 노트북, 이 친구들이 나에게 어울리지, 음식 냄새는 내 품격에 맞지 않다고! 멀쩡한 식탁 놔두고 왜 여기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오죽하면 식탁이 요즘 자기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탄하더라고." 

 

"외로워서 그러시겠지. 혼자 밥 먹는데 뭐라도 틀어놓고 보면서 먹으면 덜 적적하니까."

 

책상은 내가 주인을 옹호한 것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계속 이야기했다.

 

"어제는 정말 최악이었어. 책 읽고 계시는데 주인님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계속 들리더라고.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나서 나가시길래 밥 먹으려고 나가셨나보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불X볶음면 컵라면과 만두를 가지고 들어오셨어. 면이 다 익었는지 액상소스를 뜯어서 부으려고 하시는데 쉽게 잘 안 뜯어지는 것 같았어. 불안했지. '제발 흘리지 마라. 흘리지 마라.' 속으로 기도했어. 왜 슬픈 예감은 항상 현실이 되는지. 미간에 힘을 팍 주더니 결국 쏟아버리셨어. 노트북, 그렇지?  네가 이 일에 대해선 할 말이 더 많을 테니."

 

"말도 마. 주인님을 만난 지 1년이 지났는데, 내 물생 역대 최악의 날이었어."

 

노트북이 흥분하며 이야기했다. 

 

"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에어컨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스마트폰이 방금 말했듯이 요즘 주인님이 집에서 밥 먹을 때 예능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면서 밥을 먹어. 그것까진 좋아. 나도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걸 알 수 있으니깐. 그런데 그 소스가 어디에 떨어졌는 줄 알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쏟아졌는데, 가장 큰 덩어리가 내가 가장 아끼는 방향키들과 숫자 0, 1, 2에 떨어져 버린 거야. 젠장. 그 화끈한 것이 내 몸 틈새 틈새로 침투해버렸어. 주인님도 당황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키친타월과 물티슈로 닦았는데, 어째 닦으면 닦을수록 몸속 깊이 들어가더라고."

 

"아악~! 듣기만 해도 짜증 난다. 너 어떡하냐? 넌 내가 어떻게 청소해줄 수도 없고. 이 칠칠치 못한 주인 자식!"

 

평소 청결에 관심이 많은 청소기는 기겁을 하며 욕을 했다.

 

"어제 주인님이 여자친구랑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까 조만간 너 데리고 서비스센터에 가서 분해해서 닦는다고 말하던데?"

 

나는 노트북을 위로하려고 말했다. 

 

"아마 네가 아파서 파랗게 질려버리지 않는 이상 안 가실 거야."

 

에어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사실 내 몸 조금 더러워진 건 그래도 참을 수 있어. 더 비극적인 일은 따로 있어."

 

사뭇 어두운 표정으로 노트북이 입을 열었다.  

 

"더 비극적인 일이 있다고?"

 

청소기가 불안한 듯 물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 청소기는 뭔가 허전함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나저나 니 단짝 친구 무선마우스 안 보인다? 설마..."

 

"그래. 네가 예상한 대로 내 친구는 어제 물생의 마지막을 맞이했어. 내장 쪽으로 그 끈적끈적하고 매콤한 것이 들어가면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어. 내가 보기에도 닦는다고 쉽게 닦일 것 같지 않더라고. 꽤 정들었었는데 참 슬픈 일이지. 주인님께서 마우스를 처음 사서 오셨을 때, 작고 빨간 것이 까만 나랑 꽤 잘 어울린다고 함께 사진도 찍어주시곤 했는데 말이야. 무당벌레 같이 생겼다고 꽤 귀여워하셨었어."

 

"참 안 된 일이네. 유감이야."

 

나는 슬픈 눈으로 노트북을 바라보며 위로했다.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알다가도 모를 물생이란. 그 친구의 운명은 여기까지였나 보지."

 

"에헴. 이제 내가 다시 등장할 차례인가?"

 

서랍 속에 잠들어 있던 유선마우스가 입을 뗐다. 

 

"오! 그래. 네가 있었지? 진짜 반갑네. 그동안 너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보이던데 괜찮아?"

 

노트북이 화색을 띠며 유선마우스에게 물었다. 

 

"그래. 맞아.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 쓰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너희는 잘 모를 거야.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었어. 언젠가 다시 선택받을 날이 올 거라고 믿고 또 믿었지. 하지만 하루하루 기다림이 길어질 수록 내 믿음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어. 난 아직 쓸 만하다고 증명하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어서, 나 자신을 단련하고 또 단련했어. 안 쓸 거면 누구에게 팔거나 준다면 그나마 더 의미 있는 물생을 살 수 있을 것인데 하며 주인을 원망하기도 했어."

 

유선마우스는 그간의 심경을 담담히 전했다. 

 

"유선마우스, 너를 다시 만나게 되니 너무 감격스럽다. 앞으로 내 등 위에서 열심히 걷고 달리렴. 분명히 주인님께서 너를 다시 찾아 써주실 거야. 주인님 아직 학생이라 널 두고 굳이 새 마우스를 사시진 않을 거야. 스마트폰에게 듣자 하니 요즘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다고 하더라고. 네가 기다린 대로 너를 증명할 시간이 찾아왔어."

 

책상이 반가움을 표하며 유선마우스를 격려했다. 

 

(제 2화에서 이어서...)

 

 

제 창작물이니 절대 마음대로 도용하지 마시고, 이곳에서만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 링크를 걸어서 소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