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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생 3화
"스마트폰, 노트북, 너네, 학교 잘 다녀왔어?"
냉장고가 학교에 다녀온 나와 노트북에게 인사를 했다.
"어, 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주인님 따라 학교에 가니 기분이 좋더라고. 미래에 대한 꿈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캠퍼스! 역시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 (말하면서 한편으론 하루종일 집에만 있어야 하는 친구들에게 말실수한 것 같아 미안함을 느꼈다.) 한편으론 주인님이 후배들의 신상 폰과 노트북을 보며 바꾼지 1년밖에 안 된 우릴 또 바꿀까 약간 긴장이 되기도 했어. 요즘 100만원 가까이하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1년도 안 되어 바꾸는 일이 허다하잖아."
나는 노트북의 동조를 기대하며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인님이 아직 그렇게 크게 부러워하지 않더라고. 그 말은 아직 우리에게 꽤 만족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 하하하"
노트북은 의기양양하며 내 말을 이어받았다.
"그나저나 어제, 오늘 주인님이 나를 잘 안 찾아오시네. 보통 하루에 12번도 더 열어서 내 안부를 묻곤 하시는데 어제, 오늘은 주인님 얼굴 보기 힘드네."
냉장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 걱정하지 마. 어제 주인님이 <한 달에 10kg 감량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 홧김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신 것 같은데, 아마 내일이나 모레면 이전보다도 널 더 자주 찾으실 거야."
노트북이 안심하란 듯 두 눈썹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말했다. 살짝 동의가 되지 않았던 나는 노트북의 말에 반박했다.
"그래도 저번에 주인님이 두 달간 10kg을 감량하신 적이 있긴 해."
"맞아. 그 두 달간 나는 내 머리 위에 앉은 먼지들 때문에 무척 괴로웠어. 새치인지 먼지인지 분간도 잘 안 되어 확 늙어버린 기분이었다고! '저탄고지(탄수화물은 적게, 지방은 많이 섭취하는 일종의 다이어트법)'를 어디서 주워 듣고 와선, 밥은 거의 안 해 먹고 고기 위주로만 배를 채우더라고."
밥솥이 내 말에 동의했다.
"내 생각엔 식단보다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살이 빠진 것 같은데? 하루에 적어도 1시간씩은 꼭 운동했었어. 근데 주인님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떨 때 보면 강철같은 의지의 소유자 같은데, 어떤 땐 의지박약인 것 같아. 왜 그럴까?"
나는 주인에 대한 의문을 풀어냈다. 그러자 멀리 있던 책상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내가 보기엔 주인님은 동기부여를 확실히 받아야지만 의지가 생기는 스타일인 것 같아. 아무리 옆에서 "공부해라, 공부해라." 말해도 잘 안 듣고 "살 빼라, 살 빼라." 해도 안 듣는데, 자기가 어딘가에서 필요성을 느끼면 그때 비로소 움직이더라고.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그 동기부여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단 말이지."
노트북은 뭔가를 깨달았는지 키보드의 백라이트를 깜빡거리며 이야기했다.
"내가 알 것도 같아. 주인님은 '부끄러움'을 느낄 때 동기를 부여받는 것 같아. 오늘 학교 다녀오시자마자 갑자기 태극기의 의미에 대해서 열심히 찾아보시더라고. 학교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에게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지."
"아 그랬어?"
나는 학교에서의 일을 상기하며 물었다.
"응. 나도 아까 참 궁금했는데 잘 됐지 뭐. "
"그래, 태극기엔 어떤 의미가 있던?"
"상당히 심오하더라고. 그래도 내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간단히 이야기할게. 일단 흰 배경은 한국인의 순수함,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중간에 있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져 있는 태극무늬는 음과 양의 조화를 나타낸 데. 특히 빨강은 해, 파랑은 달을 지칭하기도 한데. 그리고 모퉁이에 있는 검은 색 작대기들은 건곤감리라고 불리는데 각각 하늘, 땅, 물, 불을 의미한다고 해. 그러니까 우주 만물을 대표하는 하늘, 땅, 물, 불이 음과 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되고 운영된다는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태극기라는 거지."
"와~ 진짜 멋진데? 이걸 누가 만들어냈을까 대단하네. 양과 음의 조화라.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류가 존속되고, 암컷과 수컷의 교미를 통해 동물들이 번식하고, -극을 띈 전자와 +극을 띈 양자가 있기에 전기도 생성되는 것이고, 또 전기가 없으면 나도, 노트북도, 에어컨도, 냉장고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지. 진짜 양과 음의 조화를 빼놓고 우주 만물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네."
나는 태극기의 심오함에 심취했다. 그리고 주인이 부끄러움에서 동기부여를 받는다는 것 같다는 노트북의 말을 여러 번 곱씹게 되었다.
'왜 주인님은 부끄러움에서 동기를 부여받을까? 지금의 모습에 뭔가 불만족스러움을 느낄 때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저번에 체중감량에 열을 내던 것도 자기 관리에 소홀했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 데서 시작한 것일까? 자취방에서 텔레비전을 없앴던 것도 밤에 자주 홀로 야한 채널을 찾아본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서 그랬던 것일까? 주인님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들은 부끄러움에서 동기를 부여받는 것일까? 아까 책상이 말해준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쐈던 이유도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던 것일까?'
확실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나는 주인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모두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주인님이 어디서 동기부여를 받는지만 생각해봤는데도 주인님과 좀 더 친해진 것 같아. 우리, 주인님에 대해 좀 더 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래야 우리도 상처를 덜 받고, 주인님도 좀 더 오래오래 기쁘게 우릴 사용하시고. 그래야 또 우리도 이 집에서 함께 오래오래 같이 지낼 수 있고 말이지."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주인도 우리를 처음 데리고 올 때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설명서를 읽어 보거나, 인터넷에서 사용 후기를 읽어 보곤 하니까 말이지. 생각보다 주인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어쩌면 좋은 주인일 수도 있어."
최근 다시 선택함을 받은 유선마우스가 엄지와 중지 손가락을 튕기며 동의했다.
물생은 제 창작물이니 절대 마음대로 도용하지 마시고, 이곳에서만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곳에 링크를 걸어서 소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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